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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개발에 대한
우리 이야기

1950-60년대 당시의 남한의 지역 상황

6/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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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도 당시의 대한 민국은 빈곤으로 말미암아 수 많은 사람들이 강냉이죽과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로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부지 기수였다.
1960년대의 1인당 평균소득은 60-70달러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국 국가중에서도 최하위 국가에 속했다.
전체 노동 인구중 60%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그것은 명목상 직업이었을 뿐이었다.
도시 지역의 공식 실업률은 16-17%에 달했다.
도시와 농촌을 모두 고려해 보면, 전체 노동 인구의 절반이 실업 상태였이 연구 결과 드러났다.
1969년도 전쟁을 치고난후, 폐허가 된 도시의 산에는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당시 인구는 2500 만명이었는데, 1인당 국민 소득이 27달러 였으니, 한 사람이 년 1만원으로 생활한 셈이었고, 900원이 한달 소득원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먹을것이 없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를 다시 끓여 꿀꿀이 죽을 해서 팔았는데, 그게 시장에서 5원에 거래되었던 시기 였다.
농림과 어업이 40%가량, 가장 많았으며, 제조업이 13%였고, 건설 산업은 전무했다.
그나마 제조업의 80%가 경공업이었는데, 농가인구는 1400만명으로 절반을 넘었으며, 1만 5천개의 제조업이 등재되었다.
기계 조립관련 회사가 1900개가 전부였는데, 전국 기준으로 기계조립에 관계한 인구는 34000명이었다.
석유화학, 플래스틱 관련 회사는 1300개로, 그에 따라 일했던 인력은 33,000명이었다.
섬유는 4600개 회사에 9600명으로 그당시의 단일 품목으로는 그래도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이 일을 해도 배가 고팠고,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 할수가 없었다.
그 당시 상수도 보급율은 17%로 저조했고, 수도 꼭지는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 대부분이 우물에서 수동펌프를 사용하여 식수를 조달해야 했다.
1949년의 국토 면적은 9만 36,034 Km였는데, 2007년도에 6.5%가 증가했다.
그해에 인구는 2019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2007년도에 4,846만명으로 증가하였다.
1인당 국민 소득이 1953년도에 67달러에서 2007년도에는 2만달러를 돌파하였다.
국내 총 생산(GDP)는 1953년 13억 달러에서 1972년도에 100달러대로 껑충 뛰었으며,
2007년도에는 9,699달러로 1953년도에 비해 746배나 증가 하였다.
이렇게 한국의 GDP가 성장하게된 배경에는 한인들의 근면성과 교육열이 경제를 성장 시키는데, 한 몫을 차지했다.
1949년도에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 되었을 당시는 인구는 2000만명이었던 것이 2012년에는 5000만명을 넘어섰다.
일본으로 해방된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두 나라로 갈라져,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북한은 남한을 침범하기 위해 소련과 중공으로 부터 원조를 받아 1950년 6월 25일 부터 침략을 단행하였다.
일명,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과 군병들이 죽고, 다쳤는데,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 사령관에 의해 북한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중국 인미군의 개입으로 인해 결국 1953년 7월 22일 22시에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을 맺고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게 되었다.
3년 1개월에 걸쳐 참담했던 한국 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 협정만이 조인되었고, 한반도에는 “제2의 삼팔선(38선)인 휴전선이 설정되어 민족 분단의 비운을 또 다시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3년 1개월간의 전쟁은 20만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 만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면, 거의 250만명이 사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80%의 산업 시설과 공공 시설과 교통 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참정국의 사망자 수는 200만명이나 달했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 여만명이 넘었으며, 그중의 85%는 민간인 이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일본이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 지역은 융산 폭격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실되었고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 많은 전쟁 고아와 1000만명의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다. 거의 폐허가 된 한국을 도와 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으로 부터 해방된 직후부터 1970년 5월까지 20년동안 물자와 외화 부족 문제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은 한국의 원조 정책에 가장 큰 기여를 해 주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한국은 국제 수지 적자를 메꾸고 경제 성장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되었고, 미국의 원조는 그 당시 가난했던 한국 정부 예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벌써 69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정부와 국민이 힘을 합쳐 민간 기업을 세우고, 중소 기업을 육성하여 대기업으로 발전시키면서, 지금 대한민 국은 G20(주요 20개국)의 중심부에 우뚝 설수 있게 되었다.
1948년 정부를 수립했을 당시의 한국 경제는 그야 말로 국민의 반 이상이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빈민국들 가운데 최악의 상태였으며, 더구나 1953년도 전쟁을 겪은 이후의 대한민국의 사회는 버려진 음식을 다시 모아 삶아 먹었던- 그것을 그 당시에는 꿀꿀이 죽이라고 불렀다-비참한 시대를 지나왔다.
그후 1961년도, 박정희 리더 정부가 출범하면서, 박정희 전대통령은 국미들의 취약한 상태를 끌어 올리기 위하여,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하여, 수출 주도형 나라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경제를 원활하게 할수 있는 고속도로의 건설은 한국의 경제의 수치를 올리는데 중요한 한 몫을 담당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대의 주요 요제였던, 노동 집약적 산업, 베트남 전쟁의 군인 수출및 경부 고속도로 건설은 한국의 경제를 가속화 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 하였다.
특별히,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어버리고, 재산을 잃어 버리고 잿더미에 앉아 울고 있던 아낙네들과, 희망을 잃어 버린 청년들에게 다시 일어날수 있도록 전개한 새마을 운동은 경제적인 부흥 뿐만이 아니라, 부강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정부와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수 있는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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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지역개발을 이룬 새마을운동

6/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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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70년대 농촌 지역 마을의 부흥을 가져온 새마을 운동
     새마을 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박정희 정부 시절,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창에 의하여 시발된후 1970년 10월에 본 격적으로 추진되어진 농촌 살리기 부흥 운동이었다.
이는 조상 대대로 내려왔던 가난을 극복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날수 있는 자립과 협동심을 길러주는데 주안점을 두어 체계적으로 수립되어졌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를 기반 조성기로 제우고, 이 때에는 주민 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을 공동 사업을 추진하여, 새마을 운동을 점화해 갔으며, 시범사업을 통하여 새마을 운동의 범량을 정립해 나갔다.
자조, 협동정신을 바탕을 둔 주민 자력 사업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을 기준 연도로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81년까지 농촌 마을을 표준화하는 새마을 운동 장기 발전 목표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실시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72년 우수 마을 우선 지원 정책은 주민들에게 새마을 운동 참여를 높이기 위하여 실시 되었는데,  그 당시 빈민한 농총 지역이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우수 마을에 선별의 형식은, 새마을 지도자의 활동사항, 주민 협동 체제의 여부, 자체 자금을 조성하여 실시하는 가 여부를 통하여 선별 되었다.
이렇게 진행되어져간 새마을 운동은 1974년부터 1976년의 새마을 운동 자조 발전기 시대를 거치면서, 새마을 운동은 모든 마을의 지역과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하였고, 전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확산을 촉진시켰다.
1974년부터는 정부 주도에서 주민들의 자율 책임 참여 분위기로 확대되면서, 생산 소득의 증대와 사회 기반의 확충, 농외 소득원의 발굴과 노임사업을 충점 추진해, 마침내 농가 소득이 도시 가구 소득에 근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량 자급화를 이루어 내는 실제적인 변화와 성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977년 공장 새마을 운동 본부가 설립되어지고, 1979년에는 모든 마을이 자립화 됨에 따라 마을 발전 단계를 자립마을,  자영마을, 복지마을을 재정 립해 나갔다.
1980년도에는 민간 주도를 위한 새마을 운동 중앙 본부가 창설되어졌고, 새마을 협동 유아원이 전국적으로 설치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잘 살아 보세’라는 기치를 내걸고, 빈곤한 농촌 지역과 실의에 빠졌던 농민들과 주민들의 정신과 의식이 바뀌어 질수 있도록 추진했던 새마을운동의 3대 기본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1970년대 시대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지역과 국가를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을 잠시 살펴 보도록 하자.
근면은 부지런함, 꾸준함, 알뜰함과 실천을 위한 한국민의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었으며, 성실한 생활 자세를 독려 함으로, 사회 발전의 기초를 쌓아 나갔다.
자조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역활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 자세를 통하여,자립정신, 주인정신감을 심어 줌으로 스스로 주민들 스스로 자신감과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갈수 있도록 장려함과 동시에 자기 극복의 실천 덕목을 쌓아 가도록 주민을 독려해 주었다.
협동은 상생과 배경의 공동체 정신으로 협동을 통해 일의 능률과 생산성을 높이고, 공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을 지속해 가면서,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세워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단합하여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그는 주민의 신망이 높은 사람으로, 다른 마을 주민들에게 신념과 겸손, 그리고 불굴의 인내력을 보여 주며, 솔선 수범하는 봉사자로서의 삶을 나타냄으로 마을 주민들이 이러한 새마을 운동 지도자의 모습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새마을 운동에 함께 참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마을 소득은 증대되어지고, 개인 소득은 향상되어지고, 영농 방법의 개선과 기술 향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정부는 농한기를 활용한 소득 사업 추진과 농의 소득을 장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마을 운동의 주체는 마을 주민 스스로가 이끌어가는데 목적을 두고 장려하였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방향으로 전환 되어가는데 있어서, 주민들의 답합과 자발성은 큰 몫을 차지하였다.
그당시 정부에서는 모든 마을을 3-5 단계로 평가해 구분 관리했는데, 지원은 단계별로 차등화하고 주민자 부담 원칙의 매칭 펀드제와 우수 마을 지원 책을 지켜 나갔다.
전국에 새마을 유치원을 설립 함으로 농촌의 여성들의 참여가 높아지면서 실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도박이 줄어들게 되었고, 가정 의례가 간소화 되었으며, 한 가정에 한 사람씩, 마을 정회나 새마을 사업에 참여케 하여, 동네 구판장 운영을 마을에 시행하게 됨으로 주민 생활이 개선되어져 나가도록 독려해 주었다.
이러한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지역은 개발 되어지고 농촌은 변화되어지기 시작했는데,
1972년도 16%였던 통일벼 보급률이 1977년도에는 55%로 늘어났으며,
핵터당 쌀 수확량은 3.34톤에서 4.94톤으로 거의 50% 증가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70년도 824달러였던 농가소득원은 1977년도에 1961달러로 3.6배 높아졌으며,
전기는 1970년도 20% 수준이었던 것이 1977년도에는 전국 농가의 98% 수준으로 보급이 증가되었다.
초기 새마을 운동 사업을 통해 한국의 농촌 마을의 초가집이 개량되어지고, 집안까지 경운기가 들어갈 수 잇또록 마을 안길이 넓어 지는 등 농촌 인프라가 개선되었으며, 전기와 전화가 가설돼, 최소한의 문화 생활도 누릴수 있게 되었고, 매년 소득이 23%씩 증가해 가기 시작했으며, 노동간 격차 해소에도 큰 역활을 하게 되었다.
이당시 새마을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가 지원한 지원금은 마을당 연간 2000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민 스스로 연간 8일의 노동력과 1700평의 토지를 내놓아 ‘잘 살아 보세’의 기치아래 살고자
주민들이 협동하여 함께 이룬 성과는 대단하였다.
1960년대의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도시와 농촌의 주민들의 마음에, 근면과, 자조, 협동 이라는 3대 정신 슬로건을 내걸고 추진했던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 운동은, 그당시 가난하고 궁핍했던 사회와 국민들에게 “잘 살수 있다”는 희망과 재건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다.
새 마을 운동은 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중요한 기치를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한국 국민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키워주고, 그들 스스로 나라를 발전시킬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정신적인 혁신을 통하여 한국 경제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부유한 대한 민국을 세워가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다는데 있어서 큰 의의를 찾아 볼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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